본문: 다니엘서 1:3-9
제목: 힘있게 승리하는 삶
(단1:3) 왕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명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의 몇 사람 (4) 곧 흠이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며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방언을 가르치게 하였고 (5) 또 왕이 지정하여 자기의 진미와 자기의 마시는 포도주에서 그들의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 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이는 그 후에 그들로 왕의 앞에 모셔 서게 하려 함이었더라 (6) 그들 중에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7)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9)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오늘 이 세상 - 엄청나게 세속적인 세상, 무신론, 물질문화, 육체문화, 매스컴의 엄청난 영향력과 더불어 무서운 맘몬의 힘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 이러한 세상 물결 가운데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떻게 이이고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을 전파하며,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다니엘과 친구들의 상황 - 전쟁에 져 나라가 망해 포로로 잡혀 가 노예가 된 상황
1. 아주 비참한 상황. 노예로 끌려가는 것보다 더 비참한 상황은 없을 것입니다.
2. 아주 눌리는 상황. 어마어마한 바벨론의 문명, 궁궐의 화려함, 손님도 기가 죽는다. 그런데 그들은 노예. 거대한 바벨론제국의 도시와 피라미드, 어마어마한 신상. 그 중에 가장 화려한 왕궁! 얼마나 기가 죽었을까? 이스라엘 촌구석 출신의 노예들, 민족의 자존심과 신앙이, 이 화려한 바벨론의 힘과 문명 앞에 무엇인가?
3. 유혹 받는 상황. 노예로 끌려온 비참한 상황 속에서 운 좋게 궁궐로 뽑혔다. 이제 모든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절대절명의 기회가 왔다. 노예지만, 왕을 측근에서 모시는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기회. 엄청난 권력도 잡을 수 있는 그런 기회.
이런 엄청난 상황 속에서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신앙의 중대한 고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세상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믿고 신앙을 지킬 것인가?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나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이런 상황 가운데에서 조금도 눌리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만을 의지하였다. 비천한 노예이며, 어린 소년이며, 망한 나라의 국민이며, 아무 볼 것도 없는 이 사람들 앞에 당대 최강의 제국 느부갓네살 황제가 무릎 꿇는 역사가 일어났다. 우리는 이것을 배워야 한다. 아무리 비참해지더라도, 아무리 세상의 힘에 눌리더라도, 세상의 화려함이 아무리 유혹하더라도, 이 바벨론 제국 속의 노예였던 소년들의 이 신앙을 배울 수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다니엘과 그 친구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신앙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첫째, 확실한 자아관.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나의 인생을 결정한다. 내가 나를 누구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생각과 말과 행동이 결정되고, 나아가서 인생이 결정된다. 비행청소년 - 자존감이 낮다. 술, 마약, 망가진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 자기가 가치 없는 존재라고 생각. 교육에 가장 중요한 것 – 자존감을 심어주는 것.
경기고등학교 교장선생님, 장교 훈련,
집안에서 부모들의 행동이 아이들의 자존감을 결정한다.
오늘 본문, 바벨론은 이 소년들의 이름을 바꾼다. 이름은 자아관의 표출. 그래서 일제시대 창씨 개명을 한 것. 한국이름을 아예 지움으로 민족의식을 말살하려는 정책.
“다니엘” =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 / “벨드사살” = 이방신 “벨의 왕자”
“하나냐” =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랴?” / “사드락” = “태양신 락크의 제자”
“미사엘” =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 “메삭” = “욕망의 신 삭크의 종”
“아사랴” =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 / “아벳느고” = “달의 신 느고의 종”
그러나, 이름까지 바뀌었지만,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자아관이 변화되지 않았다. 비록 이름은 할 수 없이 바꾸었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 분명한 자아의식이야말로 그들을 그 엄청난 바벨론의 영향력으로부터 지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
사랑하는 성도님들, 당신은 누구인가? 내가 누군지 모른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모르게 됩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입니까? 저는 한국사람입니다. 또 남자입니다. 또 목사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identity가 있지요.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아관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이것이 먼저 나의 가장 강한 주체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이것이 여러분의 자기인식입니까? 교회에 다니는 것과 그리스도인인 것과 조금 다르다. 오늘 자신에게 이것이 확실한가? 물어보라.
둘째, 확실한 가치관.
인생은 선택 -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가? 우리는 끊임없이 이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인생을 결정한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가장 큰 비극은 절대가치를 잃어버렸다는 것.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모른다. 엄청난 가치관의 혼돈.
결혼, 이혼, 성, 낙태, 자살, 동성연애. 오늘날 세대는 뭐가 뭔지 모른다. 심지어 교회까지 타락 - 오늘날 미국의 큰 교단에서 동성애를 인정. 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오늘날 신세대, X 세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1)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다 옳은 것이다. (2)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 – 반항한다. (3) 진리는 하나가 아니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을 수 있다. (4) 내가 하려고 하면 무엇이든지 가능하다. 이런 생각입니다. 우리 자랄 때는 안되는 게 더 많았어요. 그래서 할 수 없다는 생각이 큰 장애물이 되었지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안되는 게 없는 세상에서 자랐습니다. 부모가 뭐든지 다 줘요. 그래서 긍정적인 것은 좋은데, 옳고 그른 것을 분별 못하고, 무조건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경향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때로 지극히 파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과 사회의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세대건 구세대건, 세상의 조류나 철학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절대적인 가치관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지요.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인간 되게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만이 우리는 가치 있고 존귀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 길만이 우리가 참다운 인생을 살고 또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길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그 풍성하고 화려한 문명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이 세상의 편안함과 물질적인 육체적인 성공입니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입니까? 확실한 가치관으로 흔들림이 없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다니엘은 확실한 신관을 가졌습니다.
누가 주인인가? 누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가? 이 세상 자연 법칙인가? 아니면,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인가? 이것이 다니엘서의 주제입니다. 세 친구의 사건을 보세요. 누가 통치하느냐? 다니엘이 신상에 절을 하지 않아서,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그런데 털끝 하나 다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단순하히 기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믿으십니까? 다니엘은 이 부분에서 확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막강한 세상의 힘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는 아무리 세상의 힘이 강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 위에서 세상을 운행하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다니엘의 나이가 이 때 몇 살이었을까요? 대개 16살쯤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16살 소년이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바벨론의 왕궁에서 진미를 거절하는 이 놀라운 장면을 보십시오. 놀라 자빠질 일입니다. 이 어린 소년이 진리 앞에 목숨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대로 소신대로 한다 말입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왕의 진미와 단호히 거절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그 음식들은 바벨론의 우상 신에게 바쳐진 후에 왕에게 진상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음식은 같이 바벨론의 우상 신 밑에 들어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벨론과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런 경우를 종종 당합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지나치게 술을 강요합니다. 이것은 술을 마시고 즐기는 것과는 관계없이 “우리와 함께 되자”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 술 한 잔 마시는 것이 죄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소속의 문제가 숨어있습니다. 너 내 친구가 될래? 아니면, 너 혼자 믿는다고 왕따될래? 여러분, 친구가 중요합니까 하나님이 중요합니까?
이런 곳에서 신앙자는 결단해야 합니다.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이 지금 나를 보고 계시다. 나는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한다. 친구 너 없어도 나 살 수 있지만 하나님 없이는 난 못산다.” 소신 있게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믿으면 친구는 버려야 하는가? 아니지요. 하나님을 먼저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친구는 하나님 안에서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친구를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도 잃고 친구도 잃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이 믿음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십니까?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믿음대로 소신 있게 사십시오.
그런데 그게 그리 쉽게 되는가? 내 힘으로는 안된다. 어떻게?
1. 성령충만
2. 말씀 공부 –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무장
3. 경건의 삶 – 깨달음, 결단, 실천, 의식화, 습관화 – 작은 것 부터 인격의 변화